폰지사기(Ponzi scheme)란 실제로는 이윤을 창출하지 않으면서도 수익을 기대하는 신규 투자자들을 모은 뒤, 그들의 출자에 의해 마련된 투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수익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자생되는 다단계 금융 사기 수법으로 일명 '돌려막기'라 보면 된다.
쉽게 말해 A라는 투자자가 있다. A의 수익금을 B라는 투자자의 투자금액의 일부로 수익이라 칭하며 수익금을 나눠주고 B의 수익금은 C라는 새로운 투자자의 투자금으로 돈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아무 사업도 벌이지 않기 때문에 수익금은 0 일 수 밖에 없고 수익금이라는 글자는 단지 피해자를 꾀어내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결국 이 일을 벌인 사람이 모인 투자금을 들고 잠적을 하고, 이로인해 투자자들의 투자금액은 피해금액이 되는 데 이것이 바로 폰지사기이다.
폰지사기의 유래
폰지사기라는 이름은 이 수법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한 1920년대 이탈리아 출신의 금융인 "찰스 폰지"에서 유래되었다. 찰스 폰지는 몬트리올 은행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이 은행의 이자가 매우 높았다. 알고 보니 이 이자는 은행의 이자 수익이 아니라 신규 가입자의 예금에서 돌려 막는 형식으로 지급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은행의 대표는 부동산 부실 대출까지 저지른 끝에 결국 망했고, 은행장은 멕시코로 도망갔다가 추후 위조수표로 인해 꼬리가 밟혀 잡혀 3년의 징역에 처해졌다. 그리고 폰지는 깨닳았다.
아~ 망하기 전에 튀면 되는구만?
그리고 이러한 폰지 앞에 국제반신우표건(IRC)라는 회신 쿠폰이 눈에 띄었다. 이 쿠폰은 우편을 발송하는 사람이 수취인의 답신 요금을 면제할 수 있는 우표권으로,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한 국가라면 어디서든 우표로 교환을 할 수 있었다.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인터넷이 없다보니 정보망이 느리고 부실했다.
그러다보니 같은 IRC우표가 로마에선 1달러, 보스턴에서는 3.3달러 하는 식으로 국가 및 지역에 따라 가격 편차가 있었다. 그래서 폰지는 국내의 돈으로 해외의 우표를 사서 바꾸는 차익거래를 통해 돈을 번다는 포트폴리오로 투자자를 모집하였다.
처음부터 사기를 칠 생각으로 사람을 모집했던 폰지는 그냥 그럴싸한 아이템으로 사람을 모집한 것일 뿐 사업에 대한 진지한 구상같은 것은 하지않았다. 이렇게 폰지는 투자자들을 모았고 기존 투자자들에게는 새로운 투자자의 돈으로 배당금을 지급하면서 사업을 크게 번창시켰다.
폰지의 이름은 유명해졌고 수익을 얻지 못하면서도 계속 소문을 듣고 투자하는 투자자들이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폰지는 사무실을 차린데다 지점까지 냈으며 이와 더불어 고급 별장 및 고급차를 사고 여가를 즐겼다.
한편 정부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으나 로비를 벌여 범행을 무마시켰고, 투자자로부터 소송을 받기도 하였으나 변호사를 고용하여 승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끝은 있는법, 이 사건의 결말은 의외의 곳에서 시작이 되었다. 1919년, 폰지가 사기를 치기 시작할 당시 조셉 대니얼스라는 가구회사 사원에게 230달러 어치의 가구와 회사 설립 자금 200달러를 빌려 쓴 것이 종지부의 시발점이 되었다.
폰지는 이 가구회사 사원에게 사기를 치진 않았지만, 폰지가 워낙 크게 성공하여 유명해지다 보니 영업 이익이 발생하자 조셉 대니얼스 측에서 "단순한 대출이 아니었고, 자본을 제공한 비즈니스 사업파트너였다."고 주장하며 수익을 배분해달라는 소소을 제기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겁을먹은 투자자들은 발을 빼기 시작했으며 취재진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법원에서는 조사를 위해 폰지의 회사에 영업 중지 명령을 내렸으며 폰지의 사업구조를 뜯어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폰지는 1920년 사기죄로 연방법원에 기소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구속되었으며, 매사추세츠 주 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는 바로 상고하였다. 5년 뒤 만기로 출소하였고 플로리다 부동산 거품에 편승하여 또 다른 사기를 시도하다 적발되었으며 도주를 하다 붙잡혀 6년간 복역하였다.
결국 그는 1933년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1939년 브라질로 이주하여 이탈리아계 항공사에 취직하여 일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브라질이 연합국 편을 드는 바람에 항공사가 폐업을 하게되며 실직하였다. 이후 가난하게 살다 심장마비로부터 실명,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는 등 온갖 질명에 시달리다 1949년 사망했다.
세계에서 발생한 폰지사기 중 액수가 가장 큰 사건
1. Bernad Madoff 사기 ($65 billion)
Bernad Lawrence Madoff (1938년 4월 29일 ~ 2021년 4월 14일)는 전직 미국 증권 중개인, 투자 상담사, 나스닥 외부 이사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 사기 주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메이도프는 수 천명의 투자자들에게서 650억 달러(한화 약 85조)에 이르는 돈을 폰지 사기를 통해 경영 자산으로 만들었다는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법정 관리 이사회는 투자자들의 실제 손실액은 180억 달러(한화 27조 7,800억원)라고 추산하였고, 2009년 6월 29일 메이도프는 최고 150년의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는 일반인을 상대로 하지않고 국가 펀드나 대형 금융사를 상대로 사기를 쳤으며 2021년 4월 14일 미연방교도소에서 복역 중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2. Allen Standford 사기 ($8 billion)
Robert Allen Stanford (1950년 3월24일~)는 전직 미국 금융가로 2012년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80억 달러의 폰지사기를 운영하였으며 현재 110년의 형을 받고 연방 교도소 형을 복역중입니다.
그는 과거 해체된 Stanfod Financial Group of Companies의 회장이었습니다. 그는 텍사스 출신의 다섯번째 세대이며 한 때 세인트 크로이에 거주했었으며 안티과 바부다와 미국의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안티과 바부다와 미국 등 여러나라의 정치인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2009년 초, 스탠포드는 여러 사기 조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009년 2월 17일 미국 증권 거래위원화(SEC)에 의해 사기와 미국 증권법 위반 등 여러가지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앨런 스탠포드는 안티과 바부다에 기분을 둔 Stanford Intenational Bank를 통해 사기성 높은 수익률의 예금 증서를 판매하였으며 투자자들의 돈을 위험한 투자와 호화로운 생활에 탕진하였습니다. 이 사기는 20년간 지속되었으며 2009년 2월에 발각되었습니다.
3. Tom Petters ($3.65 billion)
Thomas Joseph Petters는 전직 미국 비즈니스맨이자 Petters Group Worldwide의 회작 CEO로 36.5억 달러(한화 약 4조 8천억)의 폰지사기를 운영한 회사입니다. 그는 2009년 대규모 비즈니스 사기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현재 미국 교도소 레이븐워스에서 복역중입니다. 20개의 혐으를 모두 인정하여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전선 사기, 우편 사기 및 돈세탁이 포함됩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다양한 폰지사기를 통해 40억 달러 이상을 모금한 일련의 투자 기금을 창출하였습니다. 피터스는 이러한 기금을 사용하여 자신의 대규모 자금 조달을 위한 자금 및 기타 인수를 재정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수에서 주문을 조작하고 조작한 자료를 담보로 더 많은 돈을 기금을 통해 빌렸습니다.
조희팔 폰지 사기
조희팔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폰지 사기로 알려진 사기꾼입니다. 조희팔을 LibInc라는 회사의 경영진으로 이 회사는 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로부터 4조원을 사기당한 혐의가 있습니다.
그는 의료기 역렌탈 계약 사기를 일으킨 희대의 사기꾼이며 검찰 및 경찰, 교정본부 등 각종 정부 기관에 막대한 뇌물을 뿌린 것이 드러나 더 큰 논란이 됐었습니다.
조희팔은 2004년 부터 의료기기를 사면 빌려줘서 고수익을 낸다는 식의 수법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지역별로 다른이름을 썼는데 대경권은 (주)첼린, 부울경권은 (주)씨엔, 서울, 수도권 및 충남에서는 (주)리브였습니다. 투자자에게 지속적으로 수익금을 지급하면서 신뢰를 쌓았고 결국 수십 개 법인과 49개소의 센터를 운영하였습니다.
그가 내세운 사업은 전국의 모텔이나 찜질방 등에 설치해 임대수입을 올린다는 내용으로 사람들을 속였고, 당연히 수익은 나지 않았고 뒤에 들어오는 투자자들의 돈으로 먼저 투자한 사람들에게 수익을 배당하였습니다.
시간히 흘러 결국 수익금 지급은 중단외 되었고, 조희팔은 수익이 중단되는 시점부터 사람들이 알게되는 시점까지 소요시간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하는 등 치밀하게 도주를 계획하였습니다. 그리고 2008년 10월, 회사 전산망을 파괴한 후 미리 현금화를 해 둔 자신의 개인 자산을 가지고 도주를 하였고 그 해 11월 수배가 되었으며 12월 9일 태안군 마검포항에서 중국으로 밀항을 하며 사라졌습니다.
피해액은?
우선 알려진 피해금액만 확인을 해보면 대구와 부산에서 1조원, 인천 등 수도권과 충청지역에서 총 1조 2,000억원 등 5년 동안 3만여명의 피해자가 발생하였고 피해액만 약4~5조에 달했습니다.
사망했나?
2012년 5월에 들어 2011년 12월에 조희팔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과거 원환을 가지고 있던 세력에게 청부살인을 당해 죽은 것으로 중국에서 찍어왔다는 장례식 영상을 공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조작이라는 의심을 하였지만 2016년 6월 28일 검찰에서도 사망이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고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지었습니다.
'이슈스토리 >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남 투신 10대 자살 이유 (0) | 2023.04.17 |
---|---|
학폭 기록 대학입시 반영 현재 고등학교 1학년생부터 (0) | 2023.04.13 |
강릉 산불 현재상황과 원인은? (0) | 2023.04.11 |
70대 때린 패륜아 친모 때린 이유 특수존속폭행죄 징역형 (0) | 2023.04.08 |
누누티비 차단 정부 본격대응 (0) | 2023.04.07 |
댓글